저자는 약 3년 간의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에서 깨달은 '극한의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는 방법'을 저자가 수립한 '로고 테라피'라는 정신 분석학파의 관점과 함께 소개한다. 어떠한 고통스러운 상황도 나에게서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경험, 영혼, 희망,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져왔다. 그것을 빼앗아가도록 놓아주는 것은 내 선택일 뿐이다. 그것을 간직하고 삶을 이어나가는 것도 내 선택이다. 나는 그 안에서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저자:
- 빅터 프랭클 (Victor E. Frankl)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서 빈 대학의 의학/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트 정신분석,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이어 정신 요법의 제 3학파로 일컬어지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수립했다.
* 블로그 글쓴이의 생각은 이와 같이 표시했습니다. 이탤릭체는 책의 구절과 거의 유사하게 인용한 부분입니다. 블로그 글쓴이가 강조하기 위한 부분은 밑줄을 표시했습니다.
목차: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수용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붙은 번호 이외에는 그 사람이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모든 사실이 부정되었다. 자신, 친구, 가족의 목숨을 살리는 것 외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곳, 정말로 괜찮았던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저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아우슈비츠 등 수용소에서의 끔찍한 이야기들보다 보통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들, 이를 정신 분석학적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사람들 중 90%는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됐다. 보기에 조금이라도 쓸모없어 보이는(일하는데 조금이라도 불편할 것 같은)사람에게 한 장교가 그 자리에서 손가락으로 갈 방향을 가리키는 것, 그리 대단하지 않아 보이는 이 행동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판결이었던 것이다.
그 첫번째 판결에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았겼으며, 심지어 모든 털까지도 다 깎였다. 인생 전부를 박탈당했다. 벌거벗은 몸뚱이라는 실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옷을 받아 입었고, 며칠을 빵 한개나 수프 한 그릇으로 버티면서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린 수용소는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고된 노동으로 병에 걸려 죽는 일은 흔했다. 누군가가 죽으면 그가 가지고 있었던 먹다 남은 음식, 옷 등을 빼앗아 가기 바쁠 뿐이었다. 세상에 있을 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느꼈을법할 감정을 여기서는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죽음이 일상이 되었던 것이다.
원시적인 생활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만 열중했으며, 그 외의 것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메마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저자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 아내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자는 그녀의 생사 여부도 모른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아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개의치 않고 온 힘을 다해 그녀를 회상했을 것이고 생생하고 만족스러웠을 것이라 말한다. 많은 수감자들은 이처럼 그리움을 향해 과거로 도피해 추억 속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며 현재의 존재의 공허감, 영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고된 노역이었지만 적게나마 봉급을 받을 수 있었고, 며칠을 일한 대가로 받은 봉급으로 수프 한 그릇 또는 담배 한 개비로 바꿀 수 있었다. 극도로 부족한 식량 배급에 있어서 이러한 봉급으로 음식을 바꿔 먹는 것은 필수 불가결했다. 고된 노역과 열악한 생활, 죽음의 만연함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있었다. 작업장으로 가야하는 시간이 되었어도 배설물에 절은 막사 바닥에 깔린 짚단 위에 누워서 전혀 움직이지 않거나 담배를 피는 것이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없어지고 순간적인 쾌락 추구가 뒤를 잇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며칠이 되지 않아 죽었다. 삶에 대한 의욕 상실이 우리 몸의 저항력을 급격하게 떨어뜨린 것이었다.
저자는 수용소 안에서 의사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도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동료와 수용소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마지막 회진을 끝내고, 같은 고향 출신인 친구가 거의 죽어가던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생각에 다가갔다. 그는 저자가 보였을지도 모르는 탈출하려는 기색을 눈치챘고, 저자에게 '선생님도 나갈건가요?' 라고 물어본다. 저자는 부인했지만, 불편한 감정은 점점 커졌다. 나는 갑자기 운명을 내 자신의 손으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탈출하려는 동료에게 나가지 못하겠다고, 다시 환자 곁에 남겠다고 말하는 순간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환자였던 고향 친구와 다른 환자들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해주려 애썼고,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이후부터는 수용소에서의 체험 설명에 이어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저자의 생각을 소개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극소수였을 수도 있지만, 이 진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출발점으로 '삶, 실존의 의미'에 대해 강조한다.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중요하다.
자살 시도는 삶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경우에 발생하며, 그들에게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저자는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위해 집단 정신치료를 한 사례를 소개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살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황임에 모두가 동의했고, 그 확률은 약 1/20 정도의 확률로 예상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경험, 훌륭한 생각들, 고통, 이런 것들은 과거가 되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가망없는 싸움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삶의 존엄성과 그 의미를 손상시킬 수 없고, 그 상황에서의 태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들은 (설령 그가 죽었더라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며 우리가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기를 원하는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희생은 외부의 시각으로 본다면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우리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그런 희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면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 되는 것이다.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이더라도 그 상황에서의 태도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영혼의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이 한가지 메시지가 본 책 뿐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앞으로 살아갈 삶을 관통할 큰 깨달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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